“실례지만, 이 그림에 깊이가 있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김상균: 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 777레지던스
안소연
미술비평가
김상균의 그림은 대체로 색이 선명하고 형태도 명확하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균일한 톤으로 말을 이어가는 사람처럼, 그림 하나에서 흐트러짐 없는 호흡으로 같은 톤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그것과 마주하고 서 있노라면,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명확함과 이내 시선을 마비시키는 어떤 것들의 균질함을 순차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정물과 풍경은 그의 그림에서 큰 구분 없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형상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무심하고 다소 진부하게 놓여있다. 그래, 순간적으로 떠올랐던 “놓여있다”는 말이 표현에 딱 맞는 것 같다. 그의 그림에는 숱한 형상들이 같은 무게의 붓질을 머금고 화면 위에 잘 정리된 채 놓여있다. 한쪽 벽에 바짝 붙여 차곡차곡 물건을 쌓아 올린 것처럼, 완성된 그림이 갖는 정돈된 느낌은 김상균의 그림에서 어쩌면 미리 예정된 분위기였을지 모른다.
앞선 그의 개인전 《작위作爲》(2018)를 보았을 때 막연하게 떠올랐던 첫 인상이 그랬다. 거짓말 같은 풍경들이, 한편으로는 그럴듯하게 잘 조합돼 일련의 “그림같음”을 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적당했다. 아마도 노골적으로 그림 같은 그림을 만들어 놓은 게 분명해 보였다. 그는 “작위”라는 말 속에 함축돼 있는 뭔가 의식적인 나타냄의 전략적 행위를 자신의 그림 그리는 행위와 나란히 중첩시켜 놓고, 그러한 작위의 결과가 과연 그림과 마주한 이들의 시각 경험에 어떻게 파고들어 한낱 평평한 회화의 이미지로 보일 수 있을까를 내내 염두에 두고 온 것 같다. 김상균은 <작위#1-#4>(2018) 연작을 통해, 거기서도 회화적 구도와 기법들을 콜라주 하듯 (부)자연스럽게 이어붙인 특유의 그리는 방식을 더욱 강조해 보여줬다. 더구나 처음에는 시선을 강하게 끄는 건 사실이지만 곧 식상할 만큼 흔한 수사처럼 쉽게 외면하게 되는 회화적 클리셰, 이를테면 붓으로 물감 흘리기나 나이프로 물감 찍어서 쌓아올리기를 비롯한 표현적인 효과를, 그는 화면 군데군데 무심하게 끌어다 쓴다. 이러한 작위적 선택은 그림에 대한 작가의 뛰어난 재능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지만, 동시에 “그것들은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어 보인다.”
그렇게 말한다면, 김상균은 내게 어떤 대답을 내놓을까. 그가 혼잣말처럼 써 놓은 짧은 글에서, 나는 그 없이 그의 대답을 가늠해 본다. “내가 하는 일은 시각 이미지를 의심하고 분해하는 일이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이미지 너머에 다른 것의 존재함을 인지하고 싶은 것이다.”(작가노트, 2018) 눈에 띄게 표피적인 그의 그림은 그것을 낱낱이 살피는 이들의 감각에 닿을 때, 일종의 가림막처럼 금세라도 한쪽으로 기울어 넘어질 것 같거나 아니면 한없이 진부한 형태로 장롱처럼 한쪽 벽에 붙박여 버릴 것 같은 불안을 서서히 키운다. 그는 자신이 끊임없이 의심해 온 시각 이미지의 수사와 전형을 마치 모방하듯 차용해서 화면 위에 고스란히 옮겨 나열하는 방식을 취해 왔다. 말하자면, 그는 일상에서 소비되는 이미지나 풍경의 전형 뿐 아니라 미술사적인 흐름에서 구축된 회화적 유형들을 찾아내 분석한 후, 그 표면적인 이미지에 대한 관습을 다시 모방하여 재생산하는 입장을 보여 왔다. 때문에 그의 그림은 매우 흔하고 익숙한 것들에 대한 재현으로 가득해 보이고, 또한 그것을 가능케 한 작가의 재능에 공감을 보내는 것으로 감상은 빠르게 마무리 되곤 한다. 김상균은 그가 왜 그리 만만치 않은 이미지들의 진부함에 빠져서 내내 그것을 주목하고 있는지에 대해 말해 왔다. 그것은 “회화의 한계”에 대한 집착으로 시작됐고, 다시 그것으로부터 회화의 “다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회화에 대한 사뭇 진지한 사유에 기반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가 “이미지 너머에 다른 것의 존재함”을 의식했던 것처럼 회화의 한계로부터 그것의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어떤 역전의 상황을 상상하고 있는 것 같다.
김상균은 가볍고 표피적인 시각 이미지들의 속성을 회화의 평면성과 다소 거칠게 충돌시켜 그때의 충돌하는 에너지가 발생시키는 “불편함”의 정서 또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 김상균은 《작위》 이후에 연이어 열린 개인전 《화려강산》(2018)에서 그러한 시각적 불편함의 정서를 더욱 강하게 환기시킨다. <Are you lone some tonight>(2018)이나 <숲>(2018)을 보면, 그는 자연의 풍경을 회화의 평면에 완전하게 밀착시켜 놓은 듯하다. 이차원의 납작한 풍경은 그림 안에 재현된 빛에 의해 깊은 공간을 확보해내기 보다는, 도리어 그 빛마저 균질한 평면에 펼쳐진 이미지들처럼 가볍게 하나의 평평한 색면으로 치환시켜 버렸다. 심지어 작업의 제목이 누군가에게 던지는 외로움의 현전과 그에 대한 실존적인 물음은, 사실 그 실체마저 휘발되고 사라져 적막하고 허무한 풍경의 표피만이 “Are you lone some tonight?”이라는 문장의 진부한 클리셰를 보충하고 있다. 이렇듯 김상균은 시각이미지의 표피성과 회화의 평면성을 하나로 충돌시켜 자신의 회화적 실천이 함의하는 불가피한 고립과 동시에 또 다른 회화적 가능성을 살피고 있다. 《화려강산》에서는 그러한 회화적 고립으로부터 새로운 유희를 찾으려는 그의 사색이 크게 느껴진다.
그는 진부해진 회화의 형식들과 표피만 남은 이미지들을 가져와 자신의 그림 속에 옮겨 나열하면서, 그 반복적인 무료함을 뚫고 나올 “새로움”의 유희를 기다리는 듯하다. 이때 익숙한 것들을 뚫고 나올 길들여지지 않은 이미지들의 등장은, 그것의 속내를 아직 모르는데서 오는 현재의 불편한 정서를 동반하게 마련이다. 기존의 형식과 이미지들이 본래 지니고 있던 의미로부터 딱딱한 껍질처럼 떨어져 나와 스스로의 형태를 끊임없이 모방하고 반복하며 재생산 하듯이, 김상균은 표면 너머에 더 이상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이미지들의 외피를 빌려다가 그것들을 다시 엮어 어떤 다른 지지체로 뒤에서 받쳐 놓는다. 말하자면, 그는 이미지들의 수사와 전형에 대한 과도한 중첩을 그럴듯한 손쉬운 그림으로 조화롭게 구현해 놓았다. 하지만 그렇게 임의로 조합된 김상균의 그림은 매끈한 평면에 시선을 오래 붙잡아 두는 대신 이미지들을 덧붙인 흔적들이 역력한 그림의 뒷면에 대한 불편함을 시사하면서, 그 불편함에서 기인하는 또 다른 상상을 환기시킨다. 촌스러운 생각일지 모르나, 이미지의 진실성은 그 표면의 선명하고 명확한 반짝거림이 어떤 힘에 의해 지탱되어 있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때 스스로의 고립감과 진부함을 상쇄시키는 동력을 얻게 된다.
《화려강산》에서, 풍경을 다룬 <조경>(2018)과 <화려강산#1,#2>(2018) 연작 및 일련의 <정물화#2,#3>(2018) 연작은 이질적인 것들이 강한 대비를 이루면서 억지스러운 조합에 의해 하나로 엮인 듯한 인상을 풍긴다. 캔버스 화면에 밀착된 납작한 이미지들은 눈에 띄는 정형화 된 스타일과 그것을 모방하는 붓질로만 채워져 있다. 역설적이게도 김상균은 그렇게 평평하고 왜소한 이미지들을 지탱해주는 그림 표면 너머의 현전하는 깊이에 대해 새삼 환기시킨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늘 머물러 있는 “평면적 시선”에 대해 말하면서, 그것은 “대상들의 표면적인 의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라고 했다. 이 말의 의미를 좀 더 확장해 보면, 그는 어쩌면 자신의 그림에 대해서도 그것의 표면적인 의미로부터 벗어나 그 이면의 또 다른 형태와 공간의 깊이에 다가가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글의 제목 “실례지만, 이 그림에 깊이가 있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를 쥐스킨트(Patrick Suskind) 짧은 소설 『깊이에의 강요』에서 가져왔다. 이는 이미지의 표면에 대한 김상균의 오랜 집착과 그 너머의 깊이에 대한 또 다른 상상이, 마치 쥐스킨트의 소설에서 한 화가와 비평가의 엇갈린 대화처럼 일련의 모순을 함축하면서 독특한 균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앞에서도 책에서 인용해온 “그것들은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어 보인다”는 문장의 공허함이, 이상하게도 김상균의 작업에서는 그의 작위적인 선택에 의해 비워진 표면에서 그 뒷면에 대한 실제적인 상상을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