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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2017 김상균 개인전

 

 

“기형도”전을 준비하면서 3명의 동료 작가들에게 글을 의뢰 했다.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다수의 의견을 듣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두 작가라는 점이다. 복수의 평을 듣는 것은 작업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닫힌 의미로 완결된 결말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시각을 엿보고 다음 작업의 동력을 찾으려는 것이다. 글쓴이가 동료작가인 것은 작가의 상황과 그에 따른 태도를 가장 잘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명의 글과 작가의 노트가 도록에 삽입되기에 다소 어수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수선함과 동시에 미세한 갈등과 쟁점이 보일것이라고 생각한다. 작업을 치장하는 어쩌면 포장에 가까운 역할로서 글이 도록에서의 작동방식이 아니라 이야기 꺼리를 생산하는 방식이 되었으면 한다.

 

 

 

김진기

 

<습성>

‘어떻게 잘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생기를 수반한다. 어떻게든 하면 되는 대부분의 의례적인 일들은 반대로 죽음의 공기를 머금고 있다. 리플렛이나 네오룩 한켠에 자리잡은 전시 서문은 의례 잘 읽지 않는 죽어있는 글인 경우가 많다. 생기롭지 못한 인용구가 난무하는 이 글들은 관객들에게 탐독되지 못하고 대부분 리플렛 한쪽을 채우는 의례적인 글로 소비된다. 왜들 그런 것 일까? 평소에 미술비평에 관한 글이라곤 써본 적 없는 내가 글을 의뢰받아 써보려고 안간힘을 써보니 그 이유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평소 김상균의 작품에 흐름과 변화의 과정을 비교적 지근거리 봐온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재와 같이 전형적인 회화작업에 몰입할 것이라고 예상하진 않았다. 이전 김상균의 작업은 회화적인 순간을 다른 매체적인 실험의 평면적 요소로 일부 활용할 뿐 회화 자체의 물성에 대한 실험이 중요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회화작업은 물성적 실험이나 서사적 의도가 담긴 여타의 작품과는 다른 습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장면을 프레임 그대로 가져와 한 화면 안에 응집하며 조율하는 과정을 활용하는데, 하나의 지배적인 담론이나 논의도 거부하는 듯 파편화된 프레임을 조합한다. 하나의 주제의식과는 거리가 먼 그의 작품들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보편적 서사를 거부하며 스스로 몰입된 사적 일화나 에피소드화 된 대중미디어 장면을 채집,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파편화되는 방향성을 택한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니?>

무한히 확장되고 파편화되어 버린 현대미술의 모호성은 자칫 미술가 자신의 역할마저 반문하게 하는 무기력을 불러오기 쉽다. “내가 이것을 즐기고 있는가?”라며 반문하는 김상균의 작업의 방향성을 규정하는 태도 또한 이러한 고민의 일부라고 생각된다.

김상균의 회화는 예술가로서 자신만의 삶의 방식과 언어를 끊임없이 탐색하는 그의 의지가 반영된 하나의 과정이라고 보여 진다. 새로운 기법적 실험과 매체간의 경계를 줄타기 했던 흥미로운 그의 전작들은 이제 그에게 질문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니?” 나를 더 미술가답게 하는 작업의 방식,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

그가 끊임없이 탐닉했던 영상매체의 기법적 실험, 인공적인 것과 리얼리티의 경계와 같은 이슈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회화작업 안으로 들어와 있다.

 

 

<소비되는 이미지>

작가가 특정 대상이나 장면을 선정하는 이유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과정이 아닐 경우가 많다. 프란시스 베이컨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벌어진 입도 그가 비명을 지르는 장면 묘사를 통해 공포라는 서술적인 의미 전달을 위한 논리적인 쓰임이라고 관객들은 흔히 생각할 수 있으나, 대부분의 회화매체의 창작과정에서는 이러한 앞 뒤 맥락에 대한 논리적인 사고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작가를 또 다른 차원으로 이끄는 힘을 발휘한다.

평소 작가의 이끌림을 반영한 취향과 이러한 취향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을 시각적인 경험이 채집되고 이는 작가의 눈과 신경계가 반응하는 몸의 언어로 재해석되는 것이다.

베이컨은 실베스터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반복적으로 벌어진 입에 탐닉하는 이유도 단지 입과 치아의 외관에 매료되었던 것, 그 이미지가 지닌 강렬함에 대한 집착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제 이미지는 하나의 산업화된 강력한 도구이자 수단이다. 영화, 드라마, 광고는 그 어떤 매체보다도 가장 매력적인 이미지를 생산해냄과 동시에 소비된다. 김상균 작품에 반복적으로 활용되는 이미지의 개별적 의미는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 또한 특정 영화, 드라마, 광고 컨텐츠에서 비롯된 강한 인상에 이끌림을 반영한 또 다른 시각이미지들을 소비, 재생산하며, 이미지의 충돌, 낯섦, 인위적임을 즐기고 있는게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

그린다는 것 회화는 그 어떤 매체보다 즉각적으로 신경계와 반응하는 관능적인 행태의 매체이다. 이러한 몸이 말하는 시각언어는 기계적인 기록 방식이 시각이미지를 지배하는 오늘날 보다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것을 향해 파고들어야 하는 숙명에 처해있다. 작품의 경향성-스타일을 드러내는 것은 장면, 이미지가 아니다. 구상적인 이미지에 몰두 하는 화가들이 자칫 우연적인 추상표현보다 더 모호한 실재성의 한계를 드러내듯이 관객들이 인식하는 작품의 경향성은 이미지의 실재에 대한 보다 깊은 자각으로 이끄는 감각의 영역을 어떻게 자극하느냐에 달려있다. 김상균은 실재의 강렬함을 자신만의 언어로 능숙하게 재소환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실재가 무엇이냐 보다 어떻게 근원적인 물성을 통해 감각의 영역을 다루느냐에 있다. 그래서 그림은 어렵다. 그래서 더욱 더 탐닉할 만한 가치가 있는 영역이다. 매력적이고 매끈한 시각이미지들이 소비되고 난무하는 이미지 과잉 시대에 김상균은 그림의 무의미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이라는 양가적인 태도를 담담히 드러내고 있다. 무의미함을 자각할지라도 이러한 무의미함 안에서 온전히 전념하는 태도의 우직함 하나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수집의 전략                                 신광

 

 

김상균의 이번 전시를 위한 회화작업들은 대부분 풍경들이다. 그러나 자연을 사생한 풍경과는 달리 어딘가는 불편하고 어색하다. 그의 작업에서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원인은 아마 작품의 화면을 구성하는 장치들 때문일 것이라 판단된다. 사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자연은 타인의 시선에 포착된 자연들이다. 그 이미지들은 대체로 ‘러시아 풍경화’, ‘인상주의 풍경화’, ‘인터넷공간에 떠도는 이미지’ 등과 같이 모두 작가에 의해 수집된 이미지들이다. 작가는 이런 이미지들을 ‘간접적인 대상’이라고 한다. 정확히 말해 그는 이런 이미지들을 차용하여 자신의 방식대로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이미지들을 재조직하고 병합하는 방식으로 또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의 작업을 이루는 참조대상이 타인의 시선을 거친 풍경이라는 측면만을 따지고 보았을 때 작가의 작업에는 개인이 배제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김상균의 이번 작업에는 ‘창조’라는 개념보다 ‘수집’이라는 개념이 더 강하게 부각된다. 영웅주의적 모더니즘 미술에서 ‘수집’은 창조성의 부재라는 원인으로 하위 개념으로 취급받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거부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모더니즘에 반기를 들었던 포스트모던적인 상황에서 ‘수집’의 방법론은 오히려 더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런 원인으로 필자는 김상균의 이번 시리즈작업에서 개개의 작품보다 그가 취한 방법론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작가가 수집한 이런 이미지들은 무수히 복제되어 반복되는 그런 이미지들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선택하여 자신이 정확하다고 혹은 멋지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융합하고 재조직하면 된다. 더 이상 창조는 필요 없다. 왜냐하면 이것이 이 시대가 공유하고 있는 창조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줄곧 우리 세대가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이러한 창조적인 방식에 관심이 있었다. 김상균은 이러한 방법론을 그가 선택한 페인팅이라는 어찌 보면 지극히 고전적인 매체로 실천하고 있다.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 드넓게 펼쳐진 푸른 평원, 멀리 보이는 낮은 산맥, 이 평온한 풍경은 바다위에 우뚝 솟은 아찔한 절벽위에 펼쳐진 풍경이다. 그것은 절대 가능할 수 없는 풍경이다. 이럴 듯 많은 경우 작가가 구성한 화면들은 초현실적인 환상을 자극한다. 낯설지만 조화로운 - 그것이 낯설게 다가오는 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이 조화롭다고 느끼는 것은 자연을 닮아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또한 매력적이다. 사실 작가가 취하고 있는 이런 ‘수집의 전략’은 이미 우리의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새집에 이사를 가서 집을 꾸민다고 상상해보자. 테이블과 의자는 모던틱한 디자인으로, 가전제품은 미니멀한 디자인으로, 전등은 바로크한 디자인으로, 주방은, 침실은, 가구는 … 등과 같이 자신이 상상했고 또 계획된 방향으로 집을 디자인 할 것이다. 이러한 조합은 오직 개인적인 취향에서 비롯된다. 다시 김상균의 작업으로 돌아가서, 마찬가지로 그의 작업 또한 화면을 구성하는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지극히 개인적이다. 어색할 것 같은 이 조합들을 우리는 결코 어색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우리의 창조적 패턴이 이러한 ‘짜깁기’의 방식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김상균은 페인팅이라는 매개를 통해 이러한 내용을 확실히 드러내려고 시도한다. 이 부분은 그의 개인전 <다층유희 Playing Multiple Layers:불편한 스펙터클>(2016년)에 출품했던 작품들에서 더 명확히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작업을 위해 이미지들은 선택된다. 다만 선택된 이미지들은 회화가 아닌 영화 스틸 컷에서 따온 장면들이다. 작가는 화면을 구성하면서 선택된 이미지의 아웃라인이 그대로 혹은 부분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짜깁기’의 방법론을 시각화 한다. 필자는 이러한 명확한 짜깁기의 방식을 SNS를 떠도는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에서 자주 확인한다. 우리는 이미 그러한 이미지들에 익숙해 있고 또 그러한 이미지들을 생산해내고 있었다. 김상균의 작업은 이와 같이 우리 문화에 스며들어 있는 ‘은밀한 패턴’ 혹은 ‘작동방식’들을 시각화 한다.

 

2015년의 개인전 <당신을 위한 풍경>에서 김상균의 그러한 관찰은 결과물로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아파트 조경과 같은 인공자연을 소재로 다루었다.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이러한 인공자연들은 도시 곳곳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우리는 진짜 자연보다 이러한 인공자연이 더욱 익숙하다. 그들은 진짜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다. 마찬가지로 이 풍경들도 누군가의 방식에 의하여 선택되고 짜 맞춰진 풍경이다.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으며, 심지어 인간의 요구대로 무엇이든 가능하다. 도시의 풍경을 지배하고 있는 이러한 인공자연들은 자연을 마주하는 인간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버렸다. 이제 자연은 경험적인 자연이 아니다. 파편화되고 이미지화된 자연이며, 가짜자연의 경험에 바탕을 둔 선험적인 자연이다.

 

2007년 필자는 김상균의 작업을 처음 접했다. 당시 그는 페인팅이 아닌 비디오 작업에 열중해 있었다. 그는 제작 중이던 비디오작업을 필자에게 보여주면서 추가로 이미 완성된 유사한 형식의 비디오작업들도 함께 소개해주었다. 그의 비디오 작업들에는 대체로 페인팅이라는 전통적인 매체와 상대적으로 뉴미디어로 인식되는 비디오라는 매체가 동시에 등장하였다는 것이 필자에게는 인상적이었다. 레이어를 중첩시킨다는 방법론적인 측면만 따졌을 때 그의 비디오작업은 그의 페인팅 작업과 일맥상통한다.

 

하나의 영상화면에 등장하는 정적인 평면회화가 완성되는 과정과 동적인 비디오 화면(작가가 선택하여 촬영한)은 최종적으로 작가가 계획한 연결고리에 의하여 하나의 화면을 구성하면서 영상은 끝난다. 동시에 이 작업들에 등장하는 평면회화와 비디오영상은 서로 공존하면서 매체성격의 역전현상이 일어난다. 통상적인 인식에서 회화는 과정보다는 결과물로 보여지기에 정적인 매체이고, 반대로 영상은 과정을 기록하는 동적인 매체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김상균의 비디오작업의 배경이 된 영상은 고정된 렌즈로 촬영되었고, 그 위에 역동적인 페인팅 작업의 과정이 더해지면서 마치 모니터 화면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 같은 착각을 준다. 따라서 배경이 된 영상은 오히려 정적이고 그 위에 행해지는 그리기의 과정은 동적인 느낌을 준다. 물론 이는 작가가 의도한 부분으로 초기 그의 영상작업의 형식적인 특징들이다. 이러한 형식적인 일치함으로 인해 그 시기의 작업들은 하나하나의 독립된 작업보다 오히려 시리즈작업으로 읽혔다.

 

최근 이어진 이 두 번의 개인전에서 그는 이 전까지 고집적으로 밀고 나갔던 영상작업이 아닌 페인팅 작업들로 전시장을 채웠다. 필자가 보기에 그의 이러한 매체적인 전환은 정확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 예견된 결과이다. 왜냐하면 그의 영상작업들은 내용적인 측면보다 영상이라는 매체와 회화라는 매체에 대한 형식적인 실험으로 일관되어왔고, 또 결론적으로 이러한 매체에 대한 실험은 소재의 고갈이라는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작가의 페인팅 작업은 그의 초창기 영상작업과 많이 닮아 있다. 그것은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그러하다. 이번 시리즈 작업에 대하여 작가는 전에 비해 ‘더 교묘해 졌다’고 한다. 필자는 그러한 교묘함이 ‘수집된 이미지’의 재조합이라는 방법론에 의하여 김상균은 사회적 공감대를 같이한다고 생각된다.

 

 

 

 

박근형

 

 

김상균은 인터넷과 그외 다양한 미디어에 흩어져 있는 이미지들을 차용하여 서로 어울리지 않는 성질들이 모인 상황을 표현한다. 이러한 우연(偶然)의 연대(連帶)들은 채집된 사진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연극성을 희미하게 만들며 상호 인과관계가 불분명한 대상들이 회화(繪畫)의 논리를 가지고 캔버스 안에 폐쇄되어있다. 이렇게 연속 기획된 그림들은 ‘화자(話者)가 사라진 배경(背景)’들로 보인다. 작품에 쓰여진 대부분의 이미지들은 광고물과 영화의 정지화면들이며 이런 대상들이 혼합된 재현(再現)은 관자들 스스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내재적 원리(內在的原理)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뉴미디어가 서사를 흉내내며 사실을 더욱 매혹시키는 대량의 이미지를 빠른 속도로 쏟아내기 시작하고 이러한 눈속임(Trompe-l’œil)의 경쟁 속에 드디어 사회집단의 감정을 조련할 수 있는 마력(魔力)의 장치가 되어있을때 개인의 상상력은 성문화(成文化, Codification)되고 화자(話者)의 심금(心琴)은 자유자본경제주의가 동경(憧憬)하는 이미지의 과잉 속에서 방황하고 막다른 길에 이른다.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상업매체들이 만들어낸 홍보결과물들 즉, 작가가 채집한 대상(Object)들은 탄생과 동시에 그것들이 갖고 있는 상투성들이 시간의 흐름에 의해 견고해지며 이들은 미디어의 전면에서 후퇴하고 미디어의 몸체라 할 수 있는 기억매체안에 떠돌고 있다. 상업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자기도취(自己陶醉, narcissism)는 현대 자본주의의 핵심 전략이다. 이 원리의 끊임없는 순환이 가능하기 위해 이미지들은 남용되고 용도 폐기되거나 혹은 재생의 가능성을 기다리고 있다. 작가는 이렇게 본래 기능이 사멸하지만 또한 불멸해야만하는 가상 공간 속의 잔여 이미지들을 혼합한다. 비록 그림 속의 대상들이 낭만주의(Romanticism) 회화 기법과 원근을 바탕으로하는 관점의 비율에 의해 만들어져 있지만 작품들에 구현된 구도와 색상 그리고 빛은 이미 소비재를 위해 계획된 재현들을 다시 혼합한 재현이다. 그리고 작가의 관점이 전통 낭만주의가 아닌 디지털 데이터를 기반하고 있기때문에 그림 속 요소가 원래 갖고 있는 정서(情緖)들은 캔버스의 틀 안에서 모두 원경화되고 배경 속으로 함몰되어 버린다. 역시 상업이미지의 과잉된 역동성도 그림들 속에서 본의(本意)가 사라지고 그것들의 형태만이 남아있다.

 

작업 속 망상(Delusion)들은 비활성화 되어가고 연유(緣由)를 잃어버린 상업이미지들을 분리, 혼합하고 비이상적(非理想的)인 모습으로 보이게한다. 상업이미지가 소비집단이 갖는 욕망의 역치에 더이상 이르지 못해 어느 막다른 지점에 놓인 상황, 자기도취(自己陶醉, narcissism)가 남용되고 이것들이 반복된 소비 효과를 지탱하는 중요한 개념이 되어있을때 개인의 관점은 마취(痲醉, anaesthesia)된다. 조직화된 망상(Delusion)들 너머에 재현의 과장이 본질을 능가할때 이미지의 본물(本物)에 대해 사고하는 것은 미련하다. 작가는 근원의 가치감정(價値感情)들로부터 물러나있고, 망상(Delusion)들과 함께 아무것도 보지않은 목격자가 되어 이미 고갈되었을지 모르는 인간의 상상력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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