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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탑 또는 불편한

김노암(아트스페이스 휴 대표)

1) 풍경들

 

김상균 작가의 이미지는 그림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이미지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은 거의 영화 속 장면들이다. 그의 이미지는 영화와 매우 긴밀하게 교감하고 있어서 한편으로는 포스트모던 한 현대의 영화광시대의 시대감각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의 죽음까지는 아니어도 전통적인 재현예술로서 회화의 퇴보 또는 회화의 파국을 비껴가려는 전략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영상이미지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작은 배를 타고 대양(大洋)의 거대함 속에 깊이 들어가 있을 때 우리는 막막해진다. 의식의 대양은 숭고한 미적 경험과 비슷한 무한히 변이하고 분열하는 이미지들이 파도처럼 영겁시간을 운동한다.

 

그의 그림은 이미지라기보다는 사건이다. 사건은 밋밋하고 심심하고 한가한, 무료하기까지 한 장면이 오버랩 된다. 영화적 스팩터클과 회화적 스팩터클의 차이와 공통된 점. 스팩타클은 이제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삶의 조건, 자연환경이 되어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영화 매트릭스처럼 스팩터클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어떠한 불편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주어진 스팩터클이 불편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곳과 다른 차원, 다른 세계의 선경험(先經驗)을 전제한다. 어찌되었든 회화는 영화와는 다른 운명이다.

 

드라마의 이미지들이 고층아파트처럼 쌓이고 화면의 안과 밖의 경계가 드러나며 풍경들의 분절, 영상이미지의 해체와 재구성으로 풍경이 만들어진다. 풍경 속 이미지를 쌓으려는 시도는 하나의 씬으로 융합하지 않은 채 분리되고 병치된다. 하나의 풍경 속에 안착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다른 풍경들이 침입한다. 여러 차원이 겹친다. 의식 위에 뭉게뭉게 떠오르는 현상은 복잡하고, 순서 없이 무수한 이미지들이 교차하고 뒤섞이고 이리저리 휩쓸린다. 그림은 조형적 미감보다는 사람의 의식을 분석하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풍경 속에 깊이 침잠한 상태와 풍경을 감상하는 것은 다르다. 풍경의 안과 밖을 구별하고 풍경의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운동을 전제한다. 밖에서 안으로 이동하는 과정의 감정과 심리의 변화는 양적 변화에서 질적 변화로 도약한다. 이러한 도약이후에는 풍경의 안과 밖의 구별이 사라지고 오로지 풍경 안에 침잠한 채 그 풍경을 이루는 요소들, 이미지들, 풍경의 바다 위를 둥둥 떠내려가게 된다.

 

2) 이미지의 탑

 

90년대 영화의 한국적 내면화과정을 거치며 대중예술의 대표주자로서 그리고 심지어 비디오아트 나 영상설치를 통해 소위 순수 예술의 범주를 넘나드는 보편적 문화예술의 우세종이라는 점을 떠올려보면 김상균의 영화적 회화 또는 영화와 상호작용하는(대화하는) 회화는 긍정적이며 설득적인 면모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회화에 익하고 몰입하며 고전적인 감상에 빠지기 쉬운 이들에게는 영화의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그리고 거의 전부에 걸쳐 사용하는데 거부감을 가질지도 모른다. 김상균의 회화 또는 그의 이미지는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을 사로잡은 영화의 씬을 빌려온다.

 

작가가 서울에서 벗어난 소도시의 조용한 스튜디오에서 자유롭게 그리고 은밀하게 수집하고 편집한 영화 이미지의 목록을 작가의 작업노트를 참조해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작품 ‘아케이드, 아파트’는 미국드라마(약칭 미드) ‘왕좌의 게임’과 한국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 가져온 이미지들로 꼴라주 되어 있다.

 

작품 ‘아케이드’은

1. 난장이가 낭떠러지 감옥에 갇힌 이미지, - 높은 곳에서 보는 풍경, 소수자

2. 왕과 왕비, 부부의 독대장면- 부부의 거리감, 왕실의 실내 풍경

3. 장례 장면-죽음

4. 난장이의 여인 창녀- 불은 커튼, 촛불

5. 왕비의 사색-혼자 생각하는 여자, 테이블 위의 음식(정물화 같은)

6. 연극무대와 관중-많은 구경꾼, 드라마 속 연극 장면은 권력에 입맛에 맞는 내용을 전달하는 연극임

7. 결투

8. 영웅의 탄생- 여왕이 불속에서 나오는 장면, 그것을 지켜보는 수많은 군중

9. 4명의 회의- 작당모의

10. 창밖을 바라보는 여자

11. 난장이와 창녀- 도시로 온 남자와 여자

 

작품 ‘아파트’는

 

물 부분(배들이 건축물로 모여드는 이미지 것처럼 구성)

왕좌의 게임- 출정하는 군대, 표류하는 사람

태양의 후예- 섬(드라마에서 남과여의 비밀 공간)으로 가는 보트

이 작품은 타워 펠리스 등 관망이 좋은 건물을 생각하며 구성한 작업으로, 스틸 컷은 모두 왕좌의 게임에서 가져왔다.

1. 파라다이스로 들어가는 문, 그리고 그 도시를 지배하는 사람들의 마중

2. 기사의 방- 빛이 들어오는 고풍스러운 실내, 혼자 앉아있는 남자

3. 정원의 두 여자- 식물 장식들과 뒤로 보이는 바다풍경, 빛

4. 연못, 남자와 여자- 정원과 연못이 있는 풍경,

5. 배경으로 보이는 기묘한 건물(극중 바다에서 강한 한 가문의 성)

6. 나무와 드라마틱 구름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구성하는데 사용한 재료들(영화의 씬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또한 사용된 씬들에 대해 꼼꼼한 코멘트를 단다. 이들 드라마 외에도 작가는 해외 영화 ‘쥬라기 월드(Jurassic World, 2015)’, ‘와일드(Wild, 2014)’,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The Grand Budapest Hotel, 2014)’, ‘어나더 어스(Another Earth, 2011)’, ‘리디큘러스6(The Ridiculous6)’, ‘헤이트풀8(The Hateful Eight, 2015)’, ‘오만과 편견(2005)’, ‘책도둑(The Book Thief, 2013)’, ‘게르니카(Gernika, 2016)’, 그리고 한국드라마 ‘또 오해영(2016)’, ‘닥터스(2016)’ 등의 이미지를 가져와 꼴라주한다.

 

작가가 선별한 이미지들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지만 대체로 그가 취사선택한 이미지들은 어떤 중요한 사건의 전조 또는 그 영화나 드라마의 사건을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이나 정치적 사회적 환경을 반영하는 것들이다. 그렇다고 작품 속에서 그 씬의 원천과 어떤 사건의 전개 속에서 나오는 씬인지 일일이 추출할 하등의 이유가 관객에게는 없다. 아주 소수의 영화마니아가 아닌 이상 말이다.

 

3) 불편한

 

작가는 순수하게 그 자신이 접하고 느끼는 현실과 세상의 작동방식 또는 그 구조나 동력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현대 영상문화에서 가능한 가장 인상적인 씬들을 모아놓은 현대의 대표적인 드라마와 영화들의 장면들 가운데에서 또 몇 가지의 장면을 임상 실험하듯 찢어내 재조합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 그가 선택한 제작방식은 사적이며 임의적인 속된 말로 우연과 필연이 부딪쳐 개인 안에서 스파크가 일어난 어떤 순간을 기록한다. 마음의 상태를 읽게 하는 불편과 불안의 심리를 떠올리게 한다. 곧 무슨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의 풍경들이 중첩된다. 이러한 풍경의 중첩은 의미심장한 사건의 전조이거나 아니며 그 사건은 이미 와있는 것일지도 모르는 인상을 준다. 영화가 언어와 담론이라면, 김상균의 그림 속의 영화적 코드와 회화적 코드는 새로운 의미의 코드로 변이된다.

 

수많은 꿈들 가운데 몇 가지 꿈들, 환타지 속에 중첩된 환타지 속에 갇혀있거나 여러 환타지에서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이다. 일종의 환타지로부터의 해발, 열림과 갖힘, 창문 속에 창문, 그 창문 속 창문 속 창문 속.... 거울방의 거울 속 거울 속 거울 속... 김상균의 이미지는 서로 반영하며 무한히 반영되는 거울이지의 거대한 세계, 거대한 미로를 만든다. 이러한 세계 속의 주인공은 곤혹스럽다. 우리는 결정적 장면은 대부분 미궁의 출구이자 입구에 있다. 관객에게 아리아네드의 실과 같은 가이드가 있다면 미궁(迷宮)의 수인(囚人)이 아니라 경쾌한 관람객이 될 수 있다. 작가의 수고스러운 씬의 추출과 재구성은 영화산업이 제공하는 이미지의 구조의 재구조화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 새로운 재구조화를 통해 우리의 의식이 고양된 결과는 어떤가. 환타지의 화려한 스팩터클의 연쇄 속에 결국 드러나는 것은 추레한 현실, 볼품없는 주체를 확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환타지의 무수한 겹을 가로질러 마침내 현실과 마주하는 순간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그 현실에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여전히 우리의 주위는 수많은 환타지의 스팩터클이 반복된다. 그러므로 김상균의 작업이 일관되게 지금 여기 존재의 ‘불편함’을 향하고 있다.

 

감정 없이, 어떤 느낌도 받지 못한 채 수많은 이미지들을 접하는 것이 우리의 대부분의 삶을 채운다. 이런 상태에서 ‘진정한’ 삶의 체험이란 경험은 요원하다. 내 삶, 내 존재의 진정성을 자각할 수 없는 상태는 불편하다. 김상균 작가의 이번 작업은 뭔가 우리의 의식에 매끄럽게 합류하지 못하고 파열하며 삐끗하며 걸리는 이미지들의 조합으로 구성한 것처럼 보인다. 그의 ‘불편한’ 스팩터클은 이 스팩터클의 주체가 아니라 외부로 떨어져나가는 상태의 감정을 재현한다. 개인화하는 스팩터클의 해석, 외부의 많은 현란함과 강제되는 것들, 그 과정의 감정들, 비가시적인 것들을 가시화하는 과정은 곤혹스럽다.

 

1) 김상균이 선별한 씬들이 반드시 해당 그 영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감독이나 시나리오작가 또는 원작자의 의도를 충실하게 반영한다고 볼 수 없다. 그럴 하등의 이유도 없다. 또한 영화미학이나 영화적 어법 또는 관습을 반드시 따르는 것도 아니다. 그의 이미지제작 방식을 20세기 초 소련의 전설적인 영화감독이자 몽타쥬이론가인 에이젠슈타인과 연결시키는 것도 무리다. 에이젠슈타인과 엮기에는 작가는 너무 젊다. 또 작가는 몽타쥬 이론에 대한 열의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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