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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욕망이 매개하는 인공자연과 거짓낙원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미셀 푸코는 현실에는 없는, 다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 등재된 상상의 장소를 유토피아라고 했다. 반면 분명 현실적으로 존재함에도 사실상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지워진, 최소한 일반적인 경우와는 다른 의미기능을 수행하는 장소를 헤테로토피아라고 했다. 헤테로토피아는 뭔가 미심쩍고 은밀한 사회적 혹은 차라리 반사회적 의미기능을 담당한다. 마치 마르셀 모스의 마나와도 같은. 군대와 감옥과 정신병원과 같은 억압 혹은 훈육의 헤테로토피아, 창녀촌과 휴양지 같은 쾌락 혹은 일탈의 헤테로토피아, 도서관과 박물관과 같은 시간의 헤테로토피아가 그 전형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그리고 여기에 여타의 가능한 경우들(이를테면 동물원과 식물원)과 함께 참전비와 전쟁기념관, 공원과 정원을 포함할 수가 있을 것이다. 참전비와 전쟁기념관이 전쟁과 폭력의 역사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면, 공원과 정원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 연동된다.

 특히 정원은 영국식 정원과 프랑스식 정원이 유명하다. 자연 한가운데 울타리를 쳐놓은, 그래서 울타리만 없다면 자연인지 정원인지 구분이 안 되는 정원이 영국식 정원이다. 반면 프랑스식 정원은 자연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세세한 차이를 도외시한다면, 한국식 정원과 일본식 정원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가 있겠다. 어느 경우이든 정원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 연동된다고 했다. 무슨 말인가. 정원은 자연을 소유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의 산물이다. 그 극단적인 경우가 수석이다. 자연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관상하는 것인데, 크기만 작다 뿐이지 기암괴석이며 휘어진 노송이 자연 그대로이다. 자연에 미니어처가 있다면, 이미테이션도 있다. 이젠 흔해진 인공폭포가 그렇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연동굴처럼 연출한 지하철역사가 있었다. 이런 미니어처 자연이며 자연의 이미테이션은 뭘 말해주는가. 정원이 축소된 자연이며 작은 자연이라고 한다면, 미니어처 자연과 이미테이션은 인공자연이며 가짜자연이다. 자연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자연을 탈취하던 것에서 나아가 아예 자연을 만들고 연출하기에 이른 것이고, 무슨 상품처럼 자연을 생산하고 소비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진짜 자연은 진즉에 상실되고 가짜자연이 판을 치면서 거짓 향수를 자아내 그 상실감에 따른 공허함을 달래주고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할까.

 바로 여기에 작가의 작업이 있다. 미니어처 자연이며 자연의 이미테이션, 상품처럼 생산되고 소비되는 자연, 가짜자연이 불러일으키는 거짓 향수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 이면에서 작가는 자연에 대한 상실감과 함께, 특히 자연을 무슨 상품처럼 생산하고 소비하는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욕망과 페티시즘 곧 물신에 대한 비판 내지 풍자를 겨냥한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인간은 자연을 너무 많이 착취해서 마침내 자연은 고갈되기에 이르렀고, 종래에는 가짜자연을 만들어 그 빈자리를 대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에 가짜자연은 진짜자연보다 더 매력적이다. 진짜자연처럼 부패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언제든 무슨 기계부품처럼 바꿔 끼울 수가 있어서 항상적으로 새것을 유지할 수가 있다. 방부처리 한 미라처럼, 박제처럼 항상적으로 젊음을 영원처럼 간직할 수가 있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바로 이런,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욕망에 의해 견인되는 가짜자연과 키치낙원을 뒷받침하는, 죽음의 미학이며 좀비의 미학을 주제화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크게 그림과 사진으로 나뉜다. 비록 매체는 다르지만 그 다루는 내용은 하나같이 풍경이다. 도시풍경이 없지 않지만, 대개는 자연풍경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을 보면 기암괴석과 숲이 어우러진 산 정상 같고 섬 같다. 여기에 어둠이 내리면서 달빛이라도 비칠라치면 뵈클린의 망자의 섬과도 같은 낭만주의 풍경화를 보는 것 같다. 낭만주의 풍경화가 원래 현실 저편의 메타포를 겨냥한 것인 만큼 숭고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숭고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감정용량을 초과한 대상에 맞닥트릴 때 생기는 감정이다). 그 풍경은 친근하고 낯설다. 알만한 풍경이라고 생각했는데, 보면 볼수록 낯설다. 폭포가 흐르는 산 정상에 펜스가 둘러져 있는가 하면, 바위산이라기보다는 돌무더기를 쌓아놓은 것 같다. 한껏 자연을 가장한 인공의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롤랑 바르트는 문화적 사실을 자연적 사실인 양 가장할 때 신화가 발생한다고 했는데, 바로 그런 신화와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 불편한 느낌의 정체며 실체는 무엇인가. 사실을 알고 보면 작가는 아파트 단지를 장식하고 있는 조경을 모티브로 가져왔다고 한다. 그걸 그대로 화면 위로 불러오면서, 배경에 해당하는 아파트 대신 풍경을 그려 넣었다. 풍경을 풍경으로 되돌려놓으면서 풍경을 가장한 풍경을 폭로한다. 흔히 압도적이거나 감동적인 풍경에 맞닥트릴 때 그림 같은 풍경이라고 한다. 여기서 실재와 이미지의 위상은 전도되는데(그림이 풍경의, 이미지가 실재의 기준이 되는), 바로 이처럼 전도된 풍경을 폭로한다. 그렇게 자연풍경인 줄 알았던 풍경이 사실은 도시풍경이며 인공풍경이었음이 드러난다. 이처럼 애매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단절된 콘크리트 방벽 위에 세팅된 소나무 군락지며(소나무에는 심지어 점멸등이 깜박거리기조차 한다) 플라스틱 통에 담겨진 풍경(풍경을 가장한 수석 같은)에서 작가의 의도와 기획은 더 분명해진다. 자연을 상실한 현대인이 가짜자연을 만들어 그 상실감을 달래려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며, 공공연하게는 자연마저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끝없이 펼쳐진 가로수길 위로 느닷없이 인공조명이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어스름하고 습한 기운을 머금고 있는 전나무 숲 앞에는 뜬금없이 자판기와 함께 크리스마스트리가 점멸등을 깜박거리고 있다. 느닷없이? 뜬금없이? 바로 불편한 진실이 폭로되는, 현실에 난 틈새라고 해야 할까(자크 라캉이라면 상징계의 틈새로 난 실재계의 출몰이라고 했을). 이로써 풍경은 사실 지하철 역사를 장식하고 있는, 공사장 가림 막을 장식하고 있는 프린트된 자연 이미지였음이 드러난다. 그렇게 작가는 한갓 장식으로 전락한 자연을 폭로한다. 장식을 지지하고 있는 논리는 파사드의 논리며 표면의 논리다. 파사드란 건물의 구조와는 상관없이 오로지 건물의 외양을 장식할 목적으로 건물의 전면에 덧댄 표면이며 전면을 말한다. 그럴듯한 외양으로 실재를 은폐하고 가장하는 것이므로 그 논리는 거짓이다. 그 목적은 순수하게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미지의 정치학?)에 있고, 자기를 전시하는 것에 있다.

 그렇게 길을 가다보면 대로변에 알록달록한 점퍼를 입은 마네킹들이 초현실적 풍경을 연출하고, 전쟁기념관의 미니어처가 이데올로기적 풍경을 연출하고, 마구 파헤쳐진 공사장 위로 피어오르는 먹구름(원폭에 의한 버섯구름? 하늘을 온통 뒤덮을 기세의 화산재?)이 묵시록적 풍경을 연출한다. 그렇게 자연의 위상은 장식이 되고, 재차 연출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낯익은 풍경은 낯 설은 풍경이 되고, 일상적인 풍경은 이상한 풍경이 된다. 그 풍경의 지점이며 성분들은 어쩌면 캐니와 언캐니처럼 처음부터 하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풍경은 사진에서 극명해지는데, 건물의 조명을 반영하고 있는, 달빛을 되받아 아롱거리는 수면은 사실 캔버스에 단색으로 칠한 것임이 드러나고, 현실풍경 속에 설치된 캔버스의 표면에 번들거리는 빛임이 드러난다. 자연은 장식이 되고 연출이 되었다고 했다. 작가는 바로 그런, 연출을 매개로 연출된 자연을 가장하고 흉내 내고 폭로한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친근하고 낯설다. 알만한 것이어서 친근하고, 알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을 알고 보면 짜깁기되고 편집되고 연출된 것이어서 낯설다. 그 차이를 매개하는 것이 공공연하게는 자연마저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욕망이다. 그 욕망을 페티시즘이라 하고 물신이라고 한다. 신을 상실한 시대에 물신이 사실상 신을 대체하고 있다고 한다면 논리의 비약이라고 할까. 그 욕망은 무조건적이고 무차별적이다. 그 무분별한 욕망의 드라이버 앞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원래 신이 그렇다. 그렇게 작가는 자연을 가장한 조경이며, 광고보드와 공사장 가림 막을 장식하고 있는 자연 이미지를 빌려 어쩌면 진즉에 상실했을 자연을 주지시키고, 그저 풍문으로나 떠도는 자연에 대한 덧없는 이야기를 되불러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불현듯 현실이 낯설어지고 일상이 이상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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