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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균 작가 X 신시호 큐레이터

이메일 서간 대담

 11월 18일에 ‘산수문화’공간에서 개최되는 김상균 개인전 <다층유희 – 불편한 스펙터클>을 위해 작가와 큐레이터간의 대담을 진행하였다. 이 대담록은 2016년 10월 4일부터 10월 8일까지 이메일을 통해 진행되었고 그 내용을 토대로 정리한 글이다. 신시호 큐레이터의 제안에 의해 김상균 작가가 질문하고 신시호 큐레이터가 답하는 형식으로 풀어나간다.

균: 신큐님이 작가가 질문하고 기획자가 답하는 방식을 제안 했습니다. 작업에 대한 질문을 하자니 어렵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매일 거울을 보며 자신이 변화를 모르는 것처럼, 작업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도 굳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이런 방식이 유용할 것이라는 생각도 갖게 됩니다.

당신은 첫 관객입니다. 관심사에 따라 다르겠지만 작업을 보고 첫인상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과 결과물이 보여주는 것이 서로 다른 지점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드리는 질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 작업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은 겁니다. 질문이 너무 광범위한가요? 가장 눈에 띄는 것을 한 가지만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합시다.

 

신: 김상균 작가님의 작업의 첫인상은 ‘외로움’입니다. 제가 느낀 첫인상입니다. 현대인의 고독이 묻어 나온다고 할까요. 전시 제목을 처음에 <불편한 스펙터클>이라 지으려 하셨던 것처럼, 이상향을 꿈꾸지만 영영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에, 결국 작가님이 마음에 불편하기 만한 아름다운 풍경이라 느낀다고 생각했습니다. 10년 전에 재밌게 보았던 <달콤한 인생>이란 영화가 기억납니다. 영화가 끝날 무렵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이 제자와 같은 꿈을 꾸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작가님은 그 꿈을 꾸고 난후의 감정을 토대로, 기억의 편린이 되는 이미지를 ‘호접몽’의 장자처럼 혹은 영화 <인셉션>처럼 다차원의 세계로 조직합니다. 작가님의 작업을 보는 것이 작가님의 꿈을 엿보는 듯한 기분입니다. 그렇게 관객이 작품에 감정이입이 된다면 자연스레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까요?

 

균: ‘외로움’... 작업노트를 쓰거나 작업을 설명할 때 한 번도 쓰지 않았던 단어입니다. 작업노트에 썼던 ‘구경꾼’, ‘불편한’ 이런 단어들이 그 주변을 맴돌았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들키지 않으려 애썼던 것 같기도 하고요. 어쨌든 출발점은 ‘외로움’같은 감정이 맞는 것 같습니다. 나를 괴롭고 불편하게 만드는 그런 외로움이죠.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큐님이 예로 언급한 <달콤한 인생>의 대사입니다. 여기서 ‘꿈’ 은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고,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은 슬프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고 기쁜 것을 인지하고 유지하고자 할 때 ‘외로움’과 나아가 ‘불편함’이 찾아온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위의 대사처럼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대안학교를 예로 들고 싶습니다. 대안은 잘못된 현실로부터 ‘이상향’의 방향으로 설정된 것입니다. ‘꿈’과 ‘기쁜 것’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큰 시스템은 바뀌지 않았고 대안이 끝나면 다시 잘못된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데 있습니다.

다음 질문 하겠습니다. ‘외로움’이 보였고 ‘현대인의 고독’이 보였다고 했습니다. 작업의 어떤 장면 혹은 구성에서 그런 것 들을 보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작업에서 영화와 드라마의 장면을 사용 했습니다. 미디어의 장면이 작업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 같은지 묻고 싶습니다.

 

신: 현대사회의 경향 중 하나는 급증하는 ‘1인 가구’입니다. 한국은 나 홀로 족이 500만을 돌파했다 하며 ‘혼밥·혼술’이란 용어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각종 산업과 대중매체 또한 1인의 소비 트렌드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각종 미디어도 소위 ‘먹방’이나 개인방송이란 형태 같은 한 사람을 위한 컨텐츠를 양산하고 있지요. 작가님도 혼자만의 생활을 영위하면서 가장 소비할 수 있는 형태 역시 영화나 드라마 등, 그러한 것들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이미지들이 작가님의 의식세계를 자연스레 침투했을 것이고 작업에 반영됐다는 점에서 한 개인의 고독을 느꼈던 것입니다.

회화는 전통적으로 외부 세계를 담는 ‘창문’으로서 기능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단순히 창문 바깥의 대상만을 그려내지 않죠. 우리는 TV나 모니터를 통해 쉽게 방 안에서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허나 그 ‘세상’은 더 이상 현존하는 사실이나 실재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일루전’일 뿐이죠. 그러면 다시 회화의 본질로 회귀하게 됩니다. 회화는 결국 ‘일루전’에 불과합니다. 미디어의 장면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만 존재하게 됩니다. <또 오해영>의 ‘오해영’은 결국 작가님의 머릿속에 있는 김상균의 ‘오해영’으로 실현됩니다. 그러나 실체는 어디든 없죠. 작가님이 보았던 그러한 사각형의 이미지로 부유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그 이미지는 그림 안에서 갖가지 알레고리적 성격을 띠고 작가님의 의식세계에 따라 구축되며, 구현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균: 우리가 밥 먹으면서 했던 대화가 생각나는군요. “밥은 어떻게 먹으세요?”라고 물었었고 말미에 저는 “먹는 것이 즐겁진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 하면 밥을 맛있게 먹을까요? 몰입할 대상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가장 강력한 것이 ‘사랑’이겠죠. ‘사랑’은 ‘몰입’이고 몰입하면 밥은 중요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을 사람 사이에 대한 것으로 국한시킬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동물, 책, 풍경, 작업 등 많은 것들이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개인의 생생한 경험으로의 몰입을 방해하는 것들입니다. 대표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꼽고 싶습니다. 신큐님의 말처럼 ‘혼밥․혼술’이라는 용어가 유행하고 1인의 소비 트렌드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자본은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라는 물음 이전에 소비자들의 호주머니만 노립니다. 그리고 현혹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죠.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모두가 한 방향을 가리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를 느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우리를 현혹하기 위해 내뱉는 수많은 말들이 불편해진 것입니다. 그 말들은 ‘몰입’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작업에 사용한 이미지는 자본주의가 내뱉는 수많은 말들을 대신해 차용한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불편한 스펙터클’이라고 정했던 것이고요. 2015년에 그렸던 아파트의 조경된 풍경이 그랬고 공사장 가림막의 자연 이미지가 역시 그랬습니다. 2016년에는 영화나 드라마의 풍경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이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미디어에서 표현하는 감정들은 현실의 감정을 대체합니다. 그리고 어마어마하거나 목가적인 풍경들은 관객을 현혹하기에 충분합니다. 단지 ‘일루전’인데 말입니다.

하나의 표현 매체로서 각 영화나 드라마를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회화로 가져올 때 ‘일루전’만을 가져오고 회화의 화면에서 구성을 달리하여 메시지를 담습니다. 첫 번째 방법이 사각의 틀 혹은 화면에서 잘려나간 부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방법은 장면과 장면을 이어 붙여 또 다른 장면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호수위의 장식>이 첫 번째 방법에 속할 것이고 <필로티>, <아파트>등이 첫 번째 방법과 두 번째 방법이 결합된 것입니다.

이어서 작품 하나를 정하여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작품에 어떤 요소들이 보이는지?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아케이드>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신: 아케이드는 열주(列柱)에 의해 지탱되는 아치 또는 반원형의 천장 등을 연속적으로 가설한 구조물과 그것이 조성하는 개방된 통로 공간을 말합니다. 아케이드 상가나 아케이드 게임 같은 것들로 우리에게 친숙하게 된 용어지요. 우리는 손쉽게 그것들을 소비할 수 있습니다. 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유희할 수 있죠. 자본주의 사회에 최적화된 소비 형태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갈수록 영상매체를 간단하게 소비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이든 IPTV이든 스마트폰을 이용하든지요. 다양한 컨텐츠들을 통해 자신의 입맛대로 인간의 기본 감정들인 ‘칠정(七情)’을 소비합니다. 씁쓸하게도 인간의 감정 또한 소비되는 느낌입니다.

한편 건축물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시스템이나 역사가 진행할수록 인간의 욕망을 투사하는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갈수록 과도하게 거대해졌고요. 칸트의 ‘숭고미’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실현의 과정은 결코 숭고하지 않습니다. 작가님이 언급한 미셸 오바마의 찬조연설을 예를 든 것처럼 말이지요.

작가님의 <아케이드> 작품은 중세 건물의 이미지가 주재료가 되고 한드와 미드의 이미지가 데코레이션 돼있는 듯합니다. 중세 건물을 통해 인간 혹은 권력의 허망한 욕망을 투영하고 갖가지 이미지를 통해 인간 군상의 덧없는 칠정이 덧씌워져 있습니다. 이미지의 자세한 내용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수많은 서사와 그것에 얽힌 감정들이 있겠지요. 건축물은 웅장하고 품위 있으려 하겠지만 얇은 레이어로 포장되어 그 두께감을 상실하고 납작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꽤나 처연하고도 불편하게 돼 버렸지요.

 

균: 작업의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다 이야기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큐님이 마지막 부분에 언급한 ‘이미지들의 서사’, 즉 작가만 아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아케이드>작업에 사용한 스틸 컷은 <왕좌의 게임>과 <태양의 후예>입니다. 특히 <왕좌의 게임>은 씁쓸하게 재미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온갖 화려한 것들이 다 등장하는 키치스러움 때문입니다. 스펙터클의 정점을 보여주는 듯했죠. 내용도 여러 종족?, 계파? 들의 권력 투쟁이었기 때문에 작업에 사용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했던 것 같습니다. 한 장면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아케이드>에 사용한 장면 중 불타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장면은 용의 여왕이라 불리는 극중 인물이 불타는 건물에서 나오고 사람들은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장면입니다. 작두를 타는 무당과 같은 존재이고 사람들은 영웅이 나타나 모든 것을 해결해주길 바라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두렵기도 하고요. 현재 정치나 종교적 이야기인 것 같고, 드라마에서도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장면들의 서사를 숨은그림찾기처럼 그림에 숨겨놓는 것이 작은 즐거움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작업으로 돌아와서, 사용한 각각의 이미지들이 원래 서사와는 별개로 관객에게 연상을 하게 하는 하나의 단초가 되길 바랐습니다. ‘두 사람의 대면’, ‘장례’, ‘창밖을 응시하는 사람’, ‘작당모의’, ‘연극과 군중’, ‘테이블 위의 음식과 여자’, ‘배 무리의 이동’등의 이미지들이 화면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미지들은 큰 시스템인 건물과 풍경 안에 존재합니다.

작가가 질문하는 컨셉이라 글의 흐름이 제 작업노트의 흐름과 유사한 것 같습니다. 못 했던 말이나 빠진 것이 있다면 이야기해주세요. 역으로 질문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신: 저는 여기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예술에 대한 일반론이라 할까요. 관객이 예술작품을 접할 때 예술 계수(Art coefficient)에 대해 언급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일반 관객들에게 현대미술은 어렵습니다. 비교적 전문가라고 하는 이들에게 조차도 어렵습니다. 결국 작가의 의도와 관객의 상상력의 접점은 멀어질 수밖에 없는 거죠. 인간은 원초적으로 생각하기를 싫어합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적 작용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예술을 갈망합니다. 작품 앞에서는 자신의 인지능력을 발휘하고 싶어 하죠.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작가님뿐만 아니라 모든 작가 분들이 되새겨야 할 명제이기에 때문입니다. 작가님의 작업은 개념적으로 이미 명료합니다. 작가님의 삶의 방식과 작업은 하나의 세계를 이미 구축했고 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복잡한 사고체계를 작동시키지 않아도 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반면 회화로서의 매력을 더욱 보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자기 존재를 투영합니다. 결국 김상균 본연의 매력을 극대화하여 작품의 매력을 증강하는 것이 과제일 것입니다. 관객들은 자신의 인지능력을 매력 있는 그림에게 사용하고 싶어 할 테니까요. 한편 작가와 관객과의 차이를 메우는 것은 ‘큐레이팅’, 결국 큐레이터의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지금 우리가 하는 작업처럼 큐레이터와 작가 간의 긴밀한 소통을 통해 꾸려낸 전시가 어떻게 관객들에게 보이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고 나름 기대도 해봅니다.

 

균: ‘예술 계수’라는 말이 있네요. 어렴풋이 짐작만 하던 개념입니다. 어떤 영화감독의 영화를 볼 때 기대하는 것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아마 이미 자기화하여 이해한 부분일 것입니다. 반대로 감독‧작가의 입장에서 관객의 기대에 대한 배신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밀당’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신큐님이 ‘예술 계수’라는 단어를 꺼냈습니다. 큐레이터의 역할인 것 같습니다. 작가로서 작업을 언어화하는 일이 어렵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싫어했고 어려워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전의 개인전을 생각해 보면 마지막에 개념화하는 일이 혼란스럽고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번에는 제가 도움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대화 형식의 글을 쓰는 과정에서 조금 수월했고 사실 재미도 있었습니다. 미술학원에서 케어 받는 아이처럼 말이죠.

회화로서의 ‘매력’을 보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주 듣던 말입니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자주 해줬던 말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진심 어린 조언이라는 것 알고 있습니다.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자기화의 문제입니다. 어떤 선지자가 진리를 말했다고 해서 그것을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진리가 자기 자신의 진정한 문제가 될 때 선지자의 말은 개인에게 비로소 진리가 됩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 개인으로 바로 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몸’과 ‘감정’이 하는 이야기를 잘 듣는 것이죠. 어쩌면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대신 행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또다시 자본주의의 욕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저는 회화를 개인적인 기호로 선택했습니다. “어차피 돈도 안 되는 것 하고 싶은 것 하자.”이런 생각이었습니다. 이 선택이 제발 타인이 아닌 내가 하고자 하는 기호였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에게 기호가 될 때 ‘매력’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신큐님이 보여준 열정 감사합니다. 신큐님도 즐거워서 했던 일임을 짐작하기에 저도 즐겁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1) 희(喜)ㆍ노(怒)ㆍ애(哀)ㆍ락(樂) 혹은 구(懼)ㆍ애(愛)ㆍ오(惡)ㆍ욕(欲)을 말한다. 『예기』(禮記)에서는 사람의 정(情)으로 이 칠정(七情)을 들고, 배우지 않아도 능(能)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2) 미쉘 오바마는 힐러리 클린턴의 찬조연설에서 “우리는 아이들과 매일 아침 노예가 지은 집에서 눈을 뜹니다.”라고 백악관을 지칭하여 언급하였다.

3) 예술계수(Art coefficient) - 관객이 예술작품을 감상시, 관객이 느끼는 것과 작가의 의도와의 차이를 말하는 것. 관객은 결국 그 차이를 상상력으로 메워야하는데 차이(Gap)가 멀면 어렵고, 가까우면 흥미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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